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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1975년 4월 9일!


1975년 4월 9일 새벽, 서대문에 위치한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는, 전날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관련 사건 '사형수 8인'의 사형이 집행되고 있었다.

'사건조작'은 1차 인혁당 사건부터 진행되었다.

인혁당사건은 1964년과 1974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 두 사건 모두가 박정희정권이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을 때 발생했다.

사건명 정치적 상황
사회적 상황
1차 인혁당 한일회담재개
한일회담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2차 인혁당 유신헌법제정 유신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1차 인혁당사건은 광복절을 하루 앞둔 1964년 8월 14일,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현재 국정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남한 내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형욱의 발표와는 달리 기소권을 가지고 있던 검찰은 증거가 없다며 기소를 거부하였고, 당직 검사에 의해 기소된 후 재판과정에서는 고문을 가한 사실까지 밝혀져, 1차 인혁당사건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1964년 8월
중앙정보부에서 송치한 인혁당사건 연행자 47명에 대해 이용훈 부장검사, 강원찬 검사 등이
증거가 없다며 기소를 거부함.
1964년 9월
한옥신 담당검사는 반국가단체 조직구성이라는 죄명은 빼고 47명중 26명만 기소함.
또 검찰의 재수사 과정에서 14명은 무죄로 풀려나고 나머지 12명도 반공법 위반으로
공소장이 변경되어 기소됨.
1964년 9월 9일
국회에서는 민복기법무부장관을 출석시켜, 인혁당사건의 무리한 기소경위에 대해 따지고,
이후 중앙정보부 폐지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1965년 1월 20일
1심 재판부는 피고 13명중 도예종과 양춘우에게 각각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3년과 2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함. 검찰, 항소함.
1965년 5월 29일
2심 재판부는 1심을 뒤엎고 피고 13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림.
1965년 9월 21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2심을 확정.

그러나, 용두사미격으로 끝난 재판결과와는 무관하게 사건조작의 원인이 있었던 한일협정은 65년 6월 체결되었으며, 이후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 69년에는 '3선개헌'을 통과시켰고, 72년에는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권력을 맛본 박정희정권!
2차 인혁당사건도 조작하다.

그러나, 박정희의 영구집권 시나리오는 흔들리고 있었다. 유신헌법 제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한 것이다.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등 각계 민주인사들은 이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가 발족(1973년 12월 24일)한지 십여일만에 30만명이 넘는 서명이 이뤄졌으며, 이를 기화로 숨죽이고 있던 대학생들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알려진 유신반대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유신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박정희는 또다시 폭력적인 정치적 결단을 내린다.

1974년 1월 8일 오전
일체의 반유신데모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 발동
1974년 1월 8일 오후
긴급조치를 위반하는 자를 처벌하는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하라는 긴급조치 2호 발동
1974년 1월 14일
저소득층의 조세부담을 경감하는 국면전환용 긴급조치 3호 발동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활동 금지'와 '반유신데모을 할 경우 최고 사형까지 집행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긴급조치 4호 발동

그리고는 민청학련 관계자와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1천24명을 연행하여 조사하고, 2백53명을 긴급조치 4호,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죄명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하였다. 하지만 국내외의 강력한 반발여론에 부딪힌 박정권은 75년 2월 15일 민청학련 관계자 대부분을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로 석방시켰다.

이렇게 되자 2차사건도 64년 1차사건과 마찬가지로 용두사미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남아있는 구속자들의 가족들은
1차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곧 석방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판진행과정은 1차사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군법회의는 인혁당재건위 사건관련자들과 학생들을 구분하여 재판을 진행하였으며, 공판조서가 조작되는 일도 발생했다. 1차사건 때처럼 고문수사가 들통이 나지 않도록 변호사들의 접견은 철저히 통제된 상태에서 진행되었고, 가족들의 면회는 사형직전까지도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박정희는 1975년 2월 21일 문화공보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최근 석방된 자들은 국가보안법으로 극형에 처할 수 있는 자들인데 형무소를 나올 때 마치 개선장군처럼 만세를 부르고 나왔다. 민청학련 사건은 인혁당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 명백한데 일부 정치인들은 이를 부인하고 오히려 이들을 동지니 애국인사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도 법에 안걸리는가"라며 관계자를 질책하였다. 이는 명백히 삼권분립에 어긋난 발언이었다. 아직 재판도 끝나지 않은 사건에 대해 행정부의 수반이 사법부를 통제하려는 발상이었다. 또한 이들을 옹호하는 행위에 대해서 '헌법적인 권한 발동' 운운하며 공개적인 엄포까지 놓았다.

박정희의 이러한 질책은 즉각 효과를 나타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8명의 사형이 확정하였다. 동시에 이날 '고대 학내시위'를 겨냥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대학에 군인을 주둔시키는 등 사회분위기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야말로 초헌법적인 상황이었다. 다음날 법원선고가 확정된 다음날 9일 도예종을 비롯한 8명의 열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재심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반인권적인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사법사상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며 강력한 규탄발언이 쏟아졌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사법자협회'에서는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하였으며, 엠네스티에서 사형집행에 대한 항의서한을 한국정부에 보냈다고 발표하였으며, 미국마저도 국무성 대변인 명의로 '사형에 대해 크게 유감스럽다'라고 발표하였다. 이 와중에 일본의 고위급 관리가 '한국은 야만국'이라고 표현을 했다가 양국사이에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폭압적인 방법으로 국민을 통제하던 박정희군사집단의 권력은 인혁열사 사후 몇 년간은 계속되는 듯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총애하던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억울한 죽음을 겪은 자는
이 땅의 소중한 동량들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와 십오년간 정치적 대결을 펼쳤던 그들은 누구인가?

사형(8명)
서도원, 도예종, 우홍선, 이수병, 송상진, 하재완, 김용원, 여정남
무기(7명)
이태환, 유진곤, 전창일, 이성재, 김한덕, 나경일, 강창덕
징역 20년(4명)
정만진, 이재형, 조만호, 김종대
징역 15년(4명)
전재권, 황현승, 이창복, 림구호
징역 5년(2명)
장석구, 이현세
수배 (1명) 이재문

*이재문은 후일 남민전사건으로 체포되어 옥사함.

이들은 1960년 4월 혁명을 거치면서 사회변혁운동에 나선 이들이었다. 미완의 4월혁명을 바라보며 그 완성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 이들이었다. 5.16쿠데타 이후 서도원 이수병 등은 혁명재판부에 회부되어 장기간 옥살이를 하였으며, 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도예종을 비롯하여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정만진, 김한덕, 조만호, 하재완, 이재문 등이 고문수사를 받아 형을 살거나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에서 민청학련과 인혁당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고 사형당한 여정남(당시 31세)의 경우는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하다 제적되기도 했다.

1975년 4월 9일, 이리도 일찍 죽음이 찾아오리라 생각지 못했던 그들은 사형대에 서서 '내가 죽는 이유는 오로지 민족민주운동을 했기 때문이었다.'(이수병)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도예종) 이외에도 하나같이 '독재타도, 조국통일 만세'라는 유언을 남겼다.

열사들이 가고 남은 빈자리는 이제
열사들의 뜻을 쫓으려는 이들로 가득차고 있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 23부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의 공소사실중 피고인 우홍선, 송상진,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도예종에 대한 국가보안법위반의 점, 내란예비음모의 점, 반공법위반의 점, 피고인 여정남에 대한 국가보안법위반의 점, 내란예비음모의 점 및 반공법위반의 점 중 반독재구국선언문 제작 배포로 인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반공법위반의 점은 각 무죄"라 판결하였다.

이것은 '사법살인 32년' 만에 법원은 2차 인혁당사건 재판과정이 위법하고 부당하였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이 무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진실규명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의 선두에는
항상 유족들과 살아남은 동지들이 있었다. 1989년 대구와 1990년에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후 경찰들의 탄압이 이어졌지만 매년 빠지지 않고 서울과 대구에서 추모행사가 열렸고, 이러한 노력들이 모아져
1998년에는 '소위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이 위원회의 공동대표는
당시 변호인단으로 활동했던 이돈명변호사와 구속자 가족들과 구명운동을 벌였던 문정현신부가 맡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 국가가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나서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수사 착수부터 재판까지 철저하게 조작됐다"고 조사결과를 밝혔고, 2005년에는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에서는 "(두 사건은) 전 과정에 당시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되었고, 정권유지의 필요에 따라 수사방향을
미리 결정하여 조작한 사건"이라고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국가정보원 스스로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고문ㆍ조작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한 것이다.

당시 인혁당 대책위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번 판결은 32년간을 피눈물로 살아온 유족들의 끈질긴 싸움의 승리이자 인권의 승리이다... 하지만 형장에서 8명이 삼켰을 마지막 신음소리가 아직도 천둥같이 귓가에 울린다...국가는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고 이들의 실질적인 명예회복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